가시침 3 - 海風가시

2016. 6. 14. 15:30외가의글

海風가시

9년이 지난 1979년 초봄. 아니 늦겨울이었다. 해봉은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돼 있었으나 그토록 며느리의 섬김을 열망했던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지 못하고 대구에서 어느 일간지 기자로 근무하고 있는 자신이 창피스러웠다. 한가지 좋은 점은 아버지의 선향인 청도가 대구에선 가까운 거리라 선대 조상의 산소 돌보기나, 문중묘사 같은 가문의 대소사 참여가 손쉬워진 것이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1980년대가 시작됐고 줄곳 채무관계로 해봉을 곤욕스럽게하던 아내가 끝내 수많은 채무를 남겨놓고 가출해 버린 것이었다. 헌 쌀포대의 실밥 터지듯 터져 비져나온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해봉은 부득이 경북대학교 북문 앞에 있던 단층주택을 처분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몰렸다. 겨우 빚잔치를 끝내고 해봉의 손엔 사글세집을 얻을 돈밖에 남지 않았다. 해봉은 대구북구에 위치한 금호강가 검단동에 사글세 집을 얻어 이사부터 해야했다. 지형적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는 팔공산 동촌공군기지의 전투기가 이륙하며 추진력을 받는 곳이 바로 검단동의 상공이었으므로 말할 수 없이 강한 소음이 주민들로 하여금 소음공해에 미치게 만드는 빈민판자촌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뻘밭이었으므로 우산없인 살아도 장화없인 못산다는 곳이었다. 검단동의 주택은 대부분 흙벽집이었고 너댓가구가 생활하는 구조였다. 화장실은 하나였다. 해봉이 이사한 흙벽집도 다섯가구 열아홉명이 사는 곳이었다. 마치 중국남방 커자(客家)의 토루를 연상시키는 흙벽집은 겨울엔 무시로 봉창을 드나드는 칼바람, 여름엔 고구마라도 삶아낼 것 같은 함석지붕 아래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10년은 살아도 1년은 살기 힘든, 열흘은 견뎌도 하루는 견디기 어려운 검단동생활이 시작된 것은 19857월이었다. 늦게까지 이어진 장맛비에 노모, 세 아이와 함께 한 이사로 파김치가 된 중에도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가시만 펄펄 살아 마구 찔러댔다.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이 검단동까지 따라온 자칭 빚쟁이들의 독기어린 시선의 난자로 몇가닥 남아 있지 않은 심장근육의 파열을 그냥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잘난 아내가 남기고 간 수많은 부채. 집안의 대들보라며 조혼을 강요하신 아버지가 몇 년만 더 생존해 계셨어도 장남의 이런 삶을 어떻게 보셨을까 의문이 골백번도 더 드는 회한의 삶은 어김없이 날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고 봉창문을 두드렸다. 그럴수록 해봉의 가슴엔 날마다 새로운 가시가 돋아나 마침내는 거대한 암세포줄기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불사(不死)의 그 세포는 마침내 해봉의 삶을 잇게해 주는 투쟁의 에너지마저 송두리째 뺏아가 버렸다. 살기 위해, 순전히 살기 위해 해봉은 엄청난 모험을 결심했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 받아야 했는데 해봉이 택한 전략적 선택은 고독이었다. 무슨 색깔의 고독을 선택할 것인가 ? 해봉은 날을 잡아 밤을 새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 하지만 명백한 답이 있을리 없었다. 다만 오늘 사회가 겪고 있는 부조리한 일들이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자각하고 경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게됐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 해봉은 혼잣말로 신음하듯 내뱉었다.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선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것은 해봉 개인의 삶에도 해당되는 각성이었다.

검단동의 생활은 혹독했다. 흙벽담함석집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에 몹시 민감했다. 게다가 무시로 폭발음을 흩뿌리며 솟아오르는 팔공기지의 전투기가 내뱉는 소음은 주민들의 인내심을 시험하기에 충분했다. 고막을 찢게하는 소음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해봉의 불안한 삶을 흔드는 지휘봉이었다.

열악한 생활환경에도 불구하고 검단동 주민들은 부부간의 금슬이 집집마다 하나같이 좋았다. 해봉은 서로를 아껴주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무척 부러웠다. 가슴속에 박혀있는 가시로 근육이 산산조각 찢겨져 고갈된 삶의 에너지를 보충받기 위해 그토록 애썼건만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던 고독이 아주 자유스럽게 스물거리며 해봉의 주변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아이들이 정말 씩씩하게 잘 자라 주었던 것이다.

그토록 기묘한 해봉의 인생은 백설이란 여인을 만남으로서 비로소 안정됐다. 순전히 세 아이들이 불쌍해 자신을 희생키로 결심했다는 백설은 물론 해봉이 붙여준 애칭이었다. 얼굴이며 마음이며 한결같이 백설공주처럼 예쁜 그녀가 해봉의 곁으로 다가온 것 또한 기적같은 일이었다.

1988년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됐다. 서울올림픽에 이어 장애자올림픽까지 취재보도하고 해봉이 본사로 돌아온 것은 9월이었다. 대구가 낳은 중량급 복서 이삼룡선생이 해봉에게 중매결혼을 권한 것이 해봉이 백설을 만나게 된 동기였다.

둘은 금호호텔 커피샵에서 만났다.

들으셨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집도절도 없이 하지만 그런 환경속에서도 노모를 모시고 세 아이까지 키우고 있는 자애로운 분이시라고요 ?”

저의 가슴엔 가시만 가득 남아 있는걸요.”

그 가시를 제가 모두 빼드리겠습니다.”

서로 두마디씩, 딱 네 마디의 대화만 나누고 해봉과 백설은 결혼했다. 둘다 38살의 나이였고 생일은 백설이 12일 빨랐다. 해봉은 기이한 인연에 온몸이 저려왔다. 아이들 생모도 해봉보다 생일이 열흘 빨랐는데 해봉의 짝은 모두 해봉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라던 따꺼의 말이 생각났다. 백설의 친정에선 당연히 반대가 극심했다. 가내공업이지만 사업 잘하며 등 따시고 배부른 노처녀가 뭐한다꼬 아이 셋에 노모 모시는 빈털터리에게 시집가려 하느냐는 질책에 해봉은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노릇이었다.

순전히 백설이 마련한 서민아파트서 재생의 길을 걸으며 해봉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깊이 고민해야 했다.

신문기자란 직업이 평생 자신의 앞을 가려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더욱이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매일신문사가 천주교재단이 대주주인 사업장인데다 이른바 하도 출신이 마음 편히 몸담고 있을 수 없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해봉은 시간만 나면 조사부에 들러 자신이 부산을 떠나온 이후 사회의 정세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면밀히 살펴보며 머잖은 장래 퇴직후 할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영삼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펼쳐지는 정책과 그의 동지이자 정적이던 김대중이란 야당지도자의 성향으로 봐 어차피 대한민국은 평탄하게 흘러가지 못할 것임이 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노회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정치상황이라도 최악의 상황으로 헝클어놓는데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가진 달인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을 자신이 수습하는데 또한 대단한 능력을 보이는 철면피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의 정치적 입지는 한층한층 높아져 갔다. 두말할 나위없이 공산주의자들의 정통술수인 반전(反轉)수법이었다.

 

해봉의 직장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 체육부를 벗어나 경제부에서 근무하게 된 1995년 봄이었다. 부장이 장기출장으로 일본에 가 공석중이던 봄날이었다. 편집국장이 불렀다.

박차장. 회사에서 50년사 책자를 발간키 위해 사사편찬실을 구성하고 있는데 필진으로 참여해 주시오.”

싫습니다. 현재 부장도 안계시고 대리로 데스크를 보고 있는데다 사사편찬 후 장래도 불분명한데 뭐하러 가겠습니까.”

사사 편찬후 꼭 편집국으로 복귀되도록 하겠소. 그러니 편집국장의 표정은 애절하였다. 그는 해봉에게 대놓고 하도(下道)”라고 놀리던 장본인이었다.

매일신문사에 체육부가 처음 조직돼 출범했던 197737. 초대체육부장을 역임했던 부장과 동향동족이었던 그의 당부를 들으며 해봉은 초대체육부장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해봉이 기자로 재직하며 가장 존경했던 그 부장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끝내 사사편찬실로 발령받은 해봉은 그해 연말 사사 편찬을 끝내고도 편집국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세상사 다 그런거지 뭐라는 자탄도 부질없었다. 해봉의 복귀를 약속했던 그 편집국장은 후일 뒤늦게 천주교신자가 되었고 신문사의 자회사인 기획사 사장까지 지냈음에도 해봉에게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었다.

김영삼대통령의 임기말, 중요한 정책법안이 김대중이 이끄는 야당의 비협조로 불발이 된 상황서 휘몰아쳐 온 1997년 연말의 IMF사태는 해봉더러 신문사를 떠나라고 주문하는 경영진의 몰인정 처사를 불러왔다. 관습적으로 신부가 사장으로 임명되는 매일신문사의, 취임 5년밖에 되지 않은 사장이 20여년 근무한 해봉을 면담 한번 받아 주지 않고 단칼에 명퇴시킨 것은 횡포이자 악덕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사편찬실 근무 이후 보직이 주어지지 않아 몇 달 빈 사무실만 지키다 겨우 맡은 일이 심의실부장직이었다. 그곳 또한 기피대상 1호의 직책이었음에도 3년 가까이 성실히 근무했건만 돌아온 것은 배신 뿐이었다.

참 재수도 없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라며 한탄한 것도 잠시. 2년 남짓만에 해봉은 신문사에서 퇴직해야 했다. 종이 한 장에 날라간다며 지신이 몸담은 직장을 비하한다던 공무원들이 오히려 부러웠다.

어느날 간부회의에 갔다온 심의실장이 박부장 사장에게 왜그리 밉보였나 ?”라고만 전해 준 한마디가 해직통보가 됐던 매일신문사였으니 이런 곳을 직장이라고 20여년을 몸바쳤던 해봉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해봉의 퇴직을 오히려 반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구중구의 반월당 네거리 부근에 있던 과거 신민당 대구경북당사였던 붉은 벽돌집은 전국에서 유일한 야당 재산이었다. 한국의 야당을 대표하는 신민당사였던 그곳은 대구민주화기념보존회 사무실로 변신해 있었다. 그 보존회의 초대이사장인 나학진 이사장이 해봉에게 접근했다. 1970년대~80년대 성황했던 새마을축구 대구지부장을 맡았던 나이사장이 평소 안면이 있은 해봉에게 대구경북야당사를 편찬해 달라며 접근해 왔다. 해봉은 한마디로 잘랐다. 매일신문사에서 명퇴당하며 입은 마음의 상처가 의외로 깊었던 탓이었다. 해봉을 매정하게 끊어낸 사장이며 한마디라도 해봉의 처지를 대변해준 선배가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매일신문사에서 근무한 20여년이 오히려 불명예스럽기조차 했으므로 해봉은 신문사 퇴직을 그렇게 애석해 할 필요없는 잔챙이 가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인간성과 신앙에 대한 배신이 가져다 준 부정적 이미지에서 자신을 회복하는덴 시간이 걸렸다.

해봉이 대구경북야당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여름이 오기 직전이었다. 대구의 원로야당인 신진욱씨의 학교법인 사무실에 캠프를 차리고 중앙도서관을 서너달 오가며 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우선 부록을 작성해 나갔다. 집필엔 겨우 두세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임차문 김천 등 대구의 야당인들이 감수하겠다고 해 그러라고 했는데 한번이라도 옳게 읽어봤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발간후 여러곳에서 오자가 발견됐다. 책을 집필하는동안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지도자들의 인간적 나약함,비굴함과 정치적 음모술수 등도 적나라하게 접할 수 있었다. 야당사의 제목은 초미(草靡)의 바람으로 지었다. 야당사를 발간하고난 뒤 화보집까지 발간해준 해봉은 대구교통방송국의 밤9시프로 달구벌야화의 대본을 쓰는 구성작가로 개국초부터 1년간 집필하기도 하면서 신문과 방송의 특징을 비교해 보는 경험도 익혔다. 달구벌야화는 원로탤런트 김성원옹이 방송을 맡았는데 그는 대단한 재능을 갖춘 분이었다. 김성원선생은 매주 토요일 안양에서 대구로 내려와 당일 방송분을 생방송으로 방송하고 이튿날 6일치를 녹음하고 귀가하는 행보를 거듭하며 해봉과 손발을 맞춰나갔다. 해봉은 김성원선생의 진행에 큰 성원을 보냈다. 그 무렵 전국의 교통방송사에서 모두 밤9시 야화프로를 진행했는데 해봉은 서울교통방송의 진행자보다 김성원선생의 진행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였다.

교통방송의 구성작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통방송국은 설립당시 광고를 받지 못하도록 돼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밤9시 야화시리즈 프로등 몇 개의 프로가 서울교통방송국의 프로와 병합, 동시진행되게 됨에 따라 해봉은 또다시 백수유랑의 길을 걸었다.

이 무렵 김대중정부에서 퇴직한 언론인들의 고용을 지원한다는 명분아래 언론인고용지원센터를 설립했고 가로늦게 문을 연 대구경북사무소를 한국기자협회의 추천을 받은 해봉이 책임운영자로 일을 보게됐다.

마땅한 사무소가 없어 다소 싼 값에 매일신문사빌딩9층에 세들어 사무실을 연 해봉은 다시 매일신문 빌딩을 드나든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론인고용지원센터대구경북사무소는 얼마 있지 않아 미디어교육센터 대구경북사무소로, 다시 한국언론재단 대구경북사무소로 변신하다 방송광고공사의 업무까지 맡으며 질적변화를 거듭했다.

해봉의 지위 또한 낮춰지면서 2002년말 퇴직을 앞두고 끝내 해봉은 뇌졸중 발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미 6개월전에 사직서를 제출해 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미디어교육을 하러 나간 달서구노인대학에서였다.

잦은 퇴직으로 인한 심리적 부하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성 고혈압의 발병 때문이었다.

마지막 직장이 됐던 언론재단 미디어교육국장의 직함은 30년 가까이 언론계에 종사해온 해봉에겐 영원한 패배의 상징처럼 남았다. 1주일만 있으면 책상정리 해야 하는 20021223. 그날은 몹시 추웠다. 마지막 강의차 나간 달서구노인대학에서 가족신문 만들기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목에서 해봉은 버스를 기다리다 주저앉았다.

오른쪽 귀 뒷부분에 짜릿한 자극과 함께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듯한 기분 나쁜 자극이 감지됐다. 의학적 지식이 있었던 해봉은 순간적으로 뇌출혈임을 감지하고 버스정류장의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봉의 시야엔 온통 오렌지 빛보다 더 진한 색깔의 안개비가 내렸다.

. 이것을 두고 황천이라 말하는구나.”해봉은 직감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옴을 느꼈다. 이토록 황량한 곳에서 생을 마쳐야 하다니. 해봉은 두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리는 것을 감지했다. 이제 겨우 안정된 삶을 되찾아 잇단 퇴직의 상처도 봉합돼 가는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시골로 내려가 콩 심고 감말랭이 만들며 조상 산소 가꾸며 문중 일으킬 설계까지 하고 있는데 저승길로 떠나야 하다니 ?

해봉은 그것이 천주님을 외면한 죄과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응급처방을 생각했다.

[그래 뾰족한 바늘 같은 침이 필요해.십선혈십선혈(十宣穴)을 찔러야 해] 일찍이 수지침을 배운 해봉은 십선혈을 기억해 냈다. 오른쪽 귀뒤의 부위에선 울컥울컥 하는 기분이 느껴지는 출혈이 계속 감지됐다. 그럴 때마다 해봉은 수족에서 힘이 빠져나가 한발짝도 뗄 수 없었다.

순간 버스정류소 인도에 연해 있는 아파트의 경사진 정원과 정원에 심어져 있는 줄장미가 눈에 띄었다. “그래 바로 저것이야.” 해봉은 기어가다시피 해서 겨우 아파트 담벼락에 붙었다. 그리고 길가로 늘어져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줄장미의 가시를 훑어내렸다. 더러는 손에 박히기도 하며 서너개의 가시가 손안에 떨어졌다. 그중 가장 큰 가시를 골라 해봉은 양손 열손가락 끝에 가시끝을 찔러넣었다. 순간 물총처럼 압력을 받은 몸안의 선혈이 손가락이란 통로를 통해 분사되며 땅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해봉의 행동은 때마침 정류소로 다가선 버스의 운전기사의 시야에 들어왔다. 버스를 세운 기사가 버스에서 내려와 해봉의 상태를 살폈다.

보소. 아저씨. 지금 상태가 어떤교 ? 119 불러줄까요 ?”

대답을 했어도 듣지 못했을 기사에게 해봉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신고를 받은 119구급차는 즉시 달려왔다. 경북대병원으로 호송되는 도중 구급대원들이 해봉의 핸드폰을 검색해 아내에게 연락하는 한편 혈압하강제를 주사해 주었다. 호송되는 순간 해봉은 몇십년 전 그날 환영으로 보았던 예수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또다시 보았다. 이번엔 그리스도의 얼굴보다 머리에 씌여진 면류관(冕旒冠)의 가시나무가지가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였다. 가시는 하나하나가 펄펄 살아 살을 찌르고 있었고 상처를 통해 구멍구멍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순간 해봉은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그리고 또다시 의식을 잃으며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봉의 시야에 아내와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동생 해룡의 얼굴이 페이드인 되며 다가왔다.

이제 깨 나네. 애들 아부지요. 정신이 쫌 듭니까 ? 내가 누구요 ?”

백설.”

그라먼 여기는 ?”

맹고.”

형님. 내요. 맹고가 아니라 동생.동생.”

아 맹고가 아니구나. 그래 동생이네.”

형수님. 형님이 막 깨어나 정신이 없는 모양인데 쉬도록 둡시다.”

아이구 무슨 애도 이렇게 먹이는지. 3년만이네.” 아내의 넋두리 같은 말은 필경 포항~경주간 산업도로서 일어났던 교통사고를 말함이었다. 그러니까 해봉이 체육부에 근무하던 1989년 봄이었다. 포항에서 있은 해양스포츠 행사를 취재하고 회사로 귀가하며 졸음운전을 하다 11톤 트럭과 충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일이 있었다. 그때가 해봉이 경험한 두 번째 임사경험이었다. 경주병원으로 옮겨진 해봉은 병실의 천장위로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빨리 집으로 연락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는동안 또한번 나락으로 추락했다. 대형사고를 당하면서도 다행스럽게 뇌와 척추, 심장을 다치지 않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대신 스물몇군데가 부숴진 갈비뼈 골절로 해봉은 오랜시간 고통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다. 교통사고 때는 몹시 추운 한기가 해봉의 몸을 감쌌다.

그러나 뇌졸중 때는 극심한 열기와 목마름에 해봉은 진저리를 쳐야했다.

해봉은 경북대병원서 수술을 통해 뇌속에 고인 혈전을 녹여내는동안 내내 두통에 시달렸다. 밤낮으로 수발 들어주는 아들에게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4개월간의 입원치료를 끝내고 퇴원한 날은 2003218일이었다. 그날은 대구지하철1호선 중앙로역에서 중풍장애자 김대한이 화재를 일으켜 백수십명이 사망한 바로 그날이었다. 경북대병원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구급차 행렬을 보며 해봉은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이 종이의 안팎처럼 경계가 불분명한데 그 세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활동은 정반대였다.

꽃샘추위에 가까운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해봉은 벤치에 앉았다. 앞으로 해야할 일들의 무엇인가를 정리해 보았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반드시 재기해야 한다는 결심이 무뎌지지 않도록 노력해야할 해봉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말을 찾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완치 판정은 받았지만 왼편수족마비와 언어장애가 심각한 해봉이 먼저 해야할 일은 말을 찾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해봉은 몇가지의 원칙을 정했다. 이동할 때 택시는 이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마음 먹은 이상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남에게 도와달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오후5시까지는 꼭 내방 청소를 끝내고 샤워를 마친다는 것이었다

그래 말부터 찾아야 해.”

산격동서민아파트 4층집에 누운 해봉은 아이들이 모아온 광고지를 넘기며 말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대구직업전문학교에서 관광일본어통역과정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해봉의 집이 있는 복현오거리에서 대구직업전문학교까지는 대략 4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버스 타기가 무서웠던 해봉은 일단 걷기로 했다. 3시간 가까이 걸어 도착한 대구직업전문학교의 담당교사는 여교사였다. 교사는 난감해 했다.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가 강했다. 하지만 절박한 해봉은 교사의 눈치까지 감안할 여유가 없었다.

“20여일 후에 개강하니 간단한 자기소개 정도는 일본어로 준비해 오셔야 합니다.”겉으로는 친절히 안내하는 교사의 표정으로 봐 막상 강의가 개강되면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우리말도 잃어버린 처지에 일본어관광코스를 청취하겠다니 해봉 스스로도 무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봉의 집념은 강했다. 초등학교 시절 수술로 두달의 공백을 딛고도 일류학교라는 경남중학교에 보란 듯이 합격해 냈던 해봉이 아니었던가!

마침내 개강일. 해봉은 먼저 나선 학우들의 인사를 참고삼아 인사를 했다.

와다시노 나마에와 박해봉데스. 고녠 마에 대구마이니치신분 더듬거리며 반쯤 엉터리 소개를 했음에도 학우들이 박수를 쳐주는 격려에 해봉은 단단히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6개월 과정이 끝났을 때 해봉은 유일하게 조퇴 지각 외출 한번 없는 퍼펙트출석으로 공로상을 받으며 수료할 수 있었다. 꿈같았다. 완전초보 수준이지만 일본에 가더라도 식당서 밥 사먹을 수준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명확하지는 않아도 말을 거의 찾은 것이 큰 다행이었다.

해봉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일본어 과정을 좀더 들었으면 싶었지만 연속수강은 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포기하고 대신 다른 길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것이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편입학이었다. 곧장 가을학기 3학년에 편입한 해봉은 이젠 중국어 4성발음 연습에 열을 올렸다. 한자,한문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해봉이었지만 간체자를 쓰는 현대중국어는 그리 녹녹치 않았다. 한자는 동양의 문자였지 중국어의 문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해봉에겐 온전히 한자로 쓰여진 한문강독, 고전한문연습 같은 고전과목이 가장 재미있었다. 예전 따꺼와 함께 읽고 공부했던 굴원이며 소동파의 글이며 장자, 고체시 같은 글들을 읽으며 해봉은 끝없이 큰 희열을 느끼며 차츰차츰 위험한 중풍장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해봉이 방송통신대를 다니기 두어달이 지나 겨울이 오기 직전, 아끼던 후배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떠나신 이후 어떻게 지내십니까. 변변히 이별주도 한잔 나누지 못하고 송구스럽습니다.”

무슨 말씀을. 나는 박복하여 그렇게 첫 직장생활을 끝냈지만 당신들은 훌륭한 언론인의 자세를 갖춰가며 좋은 글 많이 쓰소.”

해봉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무렵 한통의 편지가 왔다는 것이며 그 편지를 선배가 어느정도 회복되면 전해드린다고 책상설합에 넣어둔 것을 잊고 있다가 근래에 발견해 연락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거의 2년 전의 편지였다.

그럼 그 편지를 나에게 우편으로 좀 우송해 주소.”해봉은 당시 아버지의 처가이자 어머니의 친정곳인 청도매전면온막리에 작은 집을 하나 얻어 전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 도시생활에 찌든 심신을 시골의 맑은 공기가 씻어주었고 불안에 헝클어진 의지를 살을 아프게 하는 별빛이 밤마다 찔러대 재무장시켜 주었으며 미망(迷妄)의 욕심은 돌담을 타고 오는 솔바람이 씻어 주었다.

편지는 즉시 빠른등기로 우송돼 왔다. 편지를 받아든 순간의 살떨림을 해봉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었다. 겉봉에 쓰여진 글자를 본 순간 해봉을 전율케 하는 전기가 손끝을 통해 전해져 옴을 느꼈다. 편지는 천마산서 온 것이었다. 천마산 천마산 천마산 천마산 천마산! 아직 따꺼가 살아계셨단 말인가? 해봉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겉봉의 글씨를 읽었다. 그것은 따꺼가 아닌 따꺼의 아내, 즉 형수의 필체였다. 형수의 필체는 따꺼보다 좀더 해서체에 가까웠다.

편지를 받고 일주일 뒤, 해봉은 청도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탔다. 자가용이 보편화되면서 종일토록 농민들을 실어 날랐던 버스편이 크게 줄어 해봉이 청도역으로 나갈 수 있은 것은 거의 오후3시가 넘어서였다.

무궁화열차에 몸을 싣고 밀양역을 지날 때까지 오늘 부산에서 해야 할 일을 한번 더 시간대별로 묶고 보니 슬며시 잠이 들었고 그 자투리잠은 구포역을 지날 때까지 계속됐다. 왼쪽 차창으로 유명한 돼지국밥 집 덕천고가 방향의 산 위로 비게 같은 크기의 작은 구름덩이가 흐르고 있는 광경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울적해지는 기분을 주체하기 어려워 해봉은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꺼냈다. 삼십년 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 부쳐져 온 편지. 일주일 전 그 편지를 받았을 때 해봉은 경악하였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자의 영혼이 확연히 느껴지는 내용의 편지를 받아든 순간 해봉은 마치 에테르에 훈증되듯 무너져 내렸고 몽롱한 상태는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마치 중풍이 재발된 듯한 상태였다.

그의 영혼의 눈이 수십년 동안 나의 행적을 추적해 오고 있었음을 알게 됐을 때 해봉은 그가 머물고 있을 저 땅속 깊은 곳 지음(地苂)에 비쳐진 나의 그림자를 느꼈다. 그 빛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빛이 없는 밤은 물론이려니와 햇살이 충만한 낮에도 나를 비추어 두려움에 절여 지내기 며칠. 해봉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서 이겨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러자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걸친 학창시절의 그 끔찍했던 삼년을 다시금 떠올려야 했으므로 그렇게 마음먹는데 또 며칠 걸려야 했다. 이윽고 부산 충무동을 중심으로 천마산 ~ 자갈치시장으로 이어지는 단검승부 길의 동선(動線)을 그려내었고 그 길에 깔려있는 기억을 온전히 지워 내기 위해 청도역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역 광장은 언제나처럼 일군의 종교단체가 포진해 있었고 포교사들이 토해내는 마이크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덮여 있었다. 일본 덴리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의 반환을 촉구하는 천리교당의 백만인서명운동이 한창 열기를 쏟고 있었다.

아 모든 것이 저 몽유도원도처럼 한바탕 꿈인가 ? ” 해봉은 자신도 모르게 씨부렁거렸다.

지하철 하단행 열차를 타고 몇 정거장 되지 않는 토성역에서 내리자 곧장 감천고개로 오르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타났고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즈음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아재 ? 감천고개 가능교 ?”해봉의 말은 부산사투리로 완벽하게 변신해 있었다.

예 갑니더. 퍼뜩 타소.”

차비 얼맨교 ?”

천원입니더.”

해봉의 뒤를 이어 디스크를 앓는 양 엉거주춤하는 할머니 한분이 더 타자 버스는 경사도가 높은 도로를 휑하니 오르기 시작하였다. 초입에서부터 탄력을 받아 오를 요량인 듯 미니버스는 체구답잖게 무척 사납게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감천고개 가는 손님. 다음에 내리소.”하는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렸다.

아니 벌써 다 온거야. 이거 뭐야. 걸어올걸 그랬나 ? ’ 해봉은 고소를 금치 못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달려 가버린 방향으로 감천부두와 그 뒤로 남해의 풍광이 훤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영도다리며 자갈치시장이며 용두산 공원이 뿌연 스모그에 싸여 희미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영도다리 건너 조선공사 위 봉래동566번지. 해봉이 살았던 그 고향의 윤곽이 크게 상처받고 아파트 밀집 지역으로 복구된 모습으로 물 위에 떠있었다.

! 얼마만인가 ? 또다시 이곳에 올줄이야 ! ”

호주머니에서 다시 편지를 꺼냈다. 가로등 불빛을 모았다.

[서방님.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이 편지가 무사히 서방님의 수중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걱정도 됩니다. 이 편지를 받게 된다면 한번만, 꼭 한번만 저를 기억해 주세요. 간절히 빕니다. 이제 저도 머잖아 불꽃처럼 사그라질 생명의 消盡을 보면서 형님이 남기시고 간 마지막 매듭을 풀어드려야 할 일이 있어 서방님을 뵙고자 합니다. ]

불쌍한 여인...”

편지는 정확히 29년 전 해봉이 부산을 떠나와 자리잡았던 첫 직장의 발신자주소로 부쳐져 온 것이었는데 국판 한쪽 크기의 작은 종이에 필세와 명암이 각기 다른 세 부분의 볼펜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몇 번이나 망설이며 편지를 썼음이 역력하였다. 형수가 아직 살아계실까 ? 편지의 끝부분을 읽어내렸다.

[감천고개에서 내리면 천마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거기서 길을 따라 곧추 오다보면 지금은 천마공원으로 꾸며 놓은 곳이 예전 서방님이 형님과 잘 가시던 깃세땅이에요. 화장실 옆길로 내려서면 바로 청공사인데 제가 그곳에 있습니다. 지형이 많이 바뀌어 찾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청공사를 찾아 가는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마치 가정집 같은 분위기의 청공사는 아무리 쳐주어도 재산가치로 봐선 삼천만원에도 미치지 못할 빈약한 모습이었다. 아마 법당 한구석은 축축하게 습기의 침습을 받고 있음에 틀림없을 듯 보였다.

무서운 집념이에요. 호흡은 끊어졌지만 체온은 남아있는 그런 모습으로만 반년 가까이 명을 이어오고 있으니까요. 무슨 힘으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지 ?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요. 그런데 처사님 혼자 들어가 보겠소 ? 아니면 제가 같이 있어 드릴까요 ? ”

아니 괜찮소.” 해봉은 토성역 밖 가게에서 산 두유를 공양주에게 주었다.

무서울텐데 공양주 할머니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형수가 있다는 방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청공사란 이 절이 세워질 때 아줌마가 큰 돈을 보탰고 그런 연으로 법당 뒤편의 반지하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공양주 자신이 알기로 아줌마가 마치 공기만 마시고 사는듯 먹는 것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으므로 해봉은 그녀가 누군가를 꼭 한번 만나기 위해 처절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방문을 조심스레 노크한 뒤 방안에 발을 놓는 순간 해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형해만 남은 물체 하나가 컴컴한 방안에 우두커니 일어나 앉아 있었다.

서방님. 이제야 오시나요 ? ” 어디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가 싶게 의외로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형수님. 죄송합니다. 이토록 늦게 와서

불편한 몸으로 이렇게 와주시다니 참으로 고맙소. 형님도 반갑다 여길 것입니다.”

이미 떠난지 삼십년이 다된 지금 형님의 모습조차 까마득한데 형님인들 어떻게 절 기억하겠소 ? 그때 형님의 부음전보를 받고도 장례에 참석지 못하여 참으로 송구스러웠습니다.”

아니요. 서방님께서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지 않을 것이라 미리 내다보고 있었지요. 다만 자신의 잘못 생각으로 젊은 사람 하나 장래를 망쳐놓았다며 형님은 무척 후회를 하셨답니다.”

모두가 숙명이려니 여깁니다. 다만 한가지 형님은 어떻게 생을 마쳤습니까 ? ”

자살이었지요.”

어떻게요 ? ”

그건 서방님께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서방님께도 그걸 가르쳐 드렸다 들었는데. 저도 그걸 배웠으니 곧 시행해야 할 시간이 다된 것 같네요! ”

대화가 조금씩 이어지며 해봉은 공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급하게도 40년 전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고 말았다.

19703. 대학교 입학식을 마친 날, 해봉은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자갈치시장의 어물전을 찾았다. 하지만 따꺼는 없었다. 일을 그만둔지 오래됐다는 주인의 말이었다. 부부가 모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에 첫직장을 구했을 때도 어물전은 자갈치시장서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IMF때 문을 닫고 말았다. 해봉은 그 전 어물전에 편지를 보내 연락처를 열어두었고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오늘 천마산 청광사를 찾게 된 것이었다.

서방님. 무슨 생각하세요 ? ”

? 아 예.” 정신을 차렸을 때 밖엔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언제 켜졌는지 낡은 빛을 토해내는 백열등이 어둠에 밀리는지 자꾸 깜빡거렸다. 30촉짜리 백열등일 것이었다.

어둡죠? 이제 생을 끝낼 자에겐 빛도 많이 필요치 않아 밝지않은 전구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예서 하루 주무시고 가실테면 공양주에게 잠자리 좀 봐달라고 말하죠. ”

아 아닙니다. 대구 가야죠 ! ”

몸도 불편하신데 형님께선 서방님께서 중풍으로 쓰러질 줄 알고 계셨죠. 그것이 운명이라 하였습니다.”

형님의 죽음에 대해 좀더 상세히 말씀해 주세요.”

서방님과 헤어지고 난 뒤 형님은 곡기를 끊고 한달간 술만 마시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몸쌀을 심하게 앓았고 생활에 보탬이 된다며 기공치료로 제법 돈을 모았지요 ! 1982년이던가 ? 저 용두산 공원 뒤에 있던 미국문화원에 화재가 발생해 어수선하던 무렵 우리가 일하던 어물전에 형사들이 자주 찾아오자 이곳을 뜨자 하여 한동안 가덕도로 도망가 또다시 정처없이 살았습니다. 그래도 서방님이 생각난다며 다시 돌아왔을 땐 마침 이 절이 한창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가을날 취객과 시비가 붙었는지 형님이 흠씬 두들겨맞고 돌아왔죠. 형님은 이나라를 찬역하려는 무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걱정하셨죠. 형님은 작정을 했는지 자신이 갖고 있던 돈을 모두 주지에게 내놓고 저의 여생을 부탁하곤 저 기셋땅에서 단기절맥을 하여 돌아가셨답니다. 형님 자신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는데 보는 우리는 극심한 고통을 맛보았답니다.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호흡을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분명히 보았답니다. 머잖아 저도 그렇게 형님 뒤를 따를 작정입니다. 오늘이 서방님과 대면하는 마지막이 되겠네요. 부디 건강히 사세요. 서방님. 이 순간부터 저는 잊어버리세요. 죽어 서방님의 꿈에 나타나면 그날이 49제가 끝난 날이라고 여겨 주세요.“

형수의 볼에 두 줄기 눈물이 타고 내렸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가세요.”

해봉은 형수에게서 서류봉투를 하나 받았다.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결한 침묵이 형수님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해봉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리고 방문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두손 모아 축원하였다. 영도의 불빛은 예나 지금이나 휘황찬란하였다.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밤10. 열차표를 구입해 좌석에 앉아 해봉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제일 먼저 뜨이는 메모지의 글을 읽었다.

이제 이 시리고 아픈

관절을 꺾고

저 심연의 고요에

몸을 누여야 할 시간

그것은 해봉이 중학교 시절 처음 따꺼를 만났을 무렵 썼던 글귀였다. 그 뒤에 따꺼의 필체로 한줄 글이 붙어 있었다.

다만 북극성이 빛난다(但耀北辰戍).’

해봉은 구포역을 지날 무렵 깜빡 잠이 들었고 그 자투리잠은 경산역을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집에 도착해 알았지만 메모지 뒤엔 따꺼가 지은듯 한 문장 세한사(世恨詞)가 적혀 있었다. 해봉은 밤새도록 세한사(世恨詞)를 읽고 읽었다.

 

世恨 不知人生無窮處, 時間與空間 亦不知人生終着點 妄想與眞想.

吾生北間島 死於釜山港 以自閉呼吸口 瞬息間 滿腹甘.....

 

단기절맥을 하며 글을 썼던 듯 획이 분명치 않은 감()자가 마지막 글자였다. 생전 따꺼가 죽음의 맛은 달콤하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해봉은 거의 매일 따꺼가 남기고 간 세한사를 읽었다.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달라 보인 세한사는 쉬운 듯 어려웠다.

 

해봉이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나자 좀더 반듯하고 소중한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출판사업에 대한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봉이 끝내 본격적인 출판사업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준비하면서 전자출판,사진촬영 수업도 들으면서 해봉의 지적충실도는 크게 높아졌다.

그런 해봉의 시선에 자연스럽게 국내정치와 외교의 불균형 같은 현안들이 조준돼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본은 왜저토록 야만인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알고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일본인들은 국가·국민 전체가 집단적인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한 세기를 이끌어나갈 문화나 문명을 가꿔낼 능력이 없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모방해 교묘히 변형시켜 자기들 것으로 위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침략을 서슴지 않고 반성이나 배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북한은 또어떠한가. 한국전쟁을 전후해 북한은 중국과 소련이란 두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항상 줄다리기 하는데 이골이 나 있는 나라다. 장부를 조작하는 것처럼 날짜계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양아치집단이었다. 양아치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소양이 공갈과 구걸인데 북한은 그 두가지 소양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집단이며 이른바 종북세력 또한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음이 해봉의 시선에 들어왔다.

2013년 계사년이 끝나고 2014년 갑오년이 시작되며 해봉은 딱이 표현하긴 어렵지만 불안감이 이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사건들이 발생한데에는 다분히 사건들과 인과관계가 있는 원인들이 사전에 발생했음에 해봉은 주의깊게 보고 있었다.

해봉은 우선 병영 내에서 일어난 군인들의 일탈(逸脫)행위들을 주의해 보았다.상급자가 하급자를 마구잡이 구타하고 하급자가 상급자를 무시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행위들은 상명하복을 생명처럼 여겨온 병영문화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사건들이었다. 그 원인을 한번 밝혀봐야겠다 생각한 해봉은 휴가나 외출나온 사병들을 유심히 살피고 다녔다.

마른 장마가 며칠째 이어져 답답한 기운이 만연하던 6월의 어느날이었다. 여느때처럼 월례회로 모이는 군대전우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동구의 율하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열차 차량 안에서 사병 둘을 보게 됐다.

어이 젊은이들 ! ”

.어르신.”그들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뭐 좀 물어볼까 ?”

. 물어보십시오.”

요즘. 자네들 복무기간이 얼마인가 ?”

. 21개월입니다.”

? 21개월 ? 그럼 2년도 채되질 않네!”

.그렇습니다.”

해군 공군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

잘은 몰라도 역시 2년이 안되는걸루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 고맙네. 복무 잘들 하시게.”해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2년이 채되지 않는 군복무기간. 해봉은 자신이 복무하던 시절을 상기시켜보았다. 월남전이 끝나갈 무렵이었던 그때 육군의 복무기간은 36개월이었다.

아무렴. 3년이란 시간이 주는 의미를 정치가들이라고 다 잘들 알 리가 없지 ! 무엇이든 제대로 숙성되기 위해선 3년이란 시간이 지나야 하는데 한창 젊은 시절, 인내심과 애국심, 성실성이 최고조로 숙성키 위해선 3년이란 시간이 필요한거야. 그것이 2년의 영역으로 짧아지는 순간, 수많은 부작용이 발생할 씨앗이 싹터기 시작하는 것이야. 오로지 조국을 위해 충성한다는 일념으로 군복무를 해야지 2년이 안되는 복무기간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빈둥빈둥 세월만 보내려 들고 거기에 더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필경 사고를 치게되지.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제대한들 제대로 된 인내심, 성실성을 지닐 수 있을까 ?] 해봉은 반신반의 하며 귀가해 그동안 스크랩해 두었던 신문기사 스크랩북을 펼쳐보았다. 그동안 26개월로 유지되던 육군의 군복무기간이 24개월,그러니까 2년의 영역으로 추락한 것은 200310월이었다.

[그때가 어느 정권때였지 ? 맞네. 그 양반 대통령 할 때였네. 율사 출신의 교활한그 양반. 검찰의 사기를 한없이 추락시키고 법조계에 붉은 물을 여과없이,거침없이 풀어넣던 그 양반.] 해봉은 깊은 신음을 토해냈다.

[어디 그뿐인가 ? 그양반이 호적법도 폐지시키지 않았던가 ? 아마 그것이 2007년 여름이 시작될 때였지 ? 아직까진 크게 표나지 않아 모르겠지만 호적법 폐지가 몰고울 폐해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가문의 소중함과 자존심으로 역사를 이루고 살아온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한 순간에 무너뜨려질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 역사의 소중함을 버리고 경박함과 천박함만이 횡행할 바탕에 주변국들은 또 얼마나 한국을 우습게 가벼이 여기고 침범할 것인가. 중국의 동북공정이 필시 연유가 있는 것이며 일본의 동해(東海) 침탈이 역시 그러한 것이다. ]

[역사를 부정하는 악의 무리들이 준동해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출판케 하고 종교인마저 타락해 기독(基督)을 팔고 탐진치의 3독에 빠지는데 주저함이 없다.]

[국권회복에 평생을 사루었던 백범선생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기를 원했던가. 바로 아름다운 나라였다. 아름다운 나라는 협동하고 발전하는 나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각자는 각자가 맡은바 충실해야 한다. 우선 벌칙조항이 없는 국회법에 벌칙조항을 삽입해야 하며 국회의원들에게도 성과급제를 도입해 법을 고쳐야 한다. 그리고 열성적으로 입법활동을 하는 자와 태만한자의 월급에 차등을 주도록 하며 국회의원들이 각성할 수 있을만큼 한시적으로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

[인내야말로 최고의 덕성임을 알아야 한다.]

예순셋의 가을은 해봉에게 참담한 슬픔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국정을 책임진 통수권자의 인격이 참담하게 침범당해도 분노하는 국민이 없어서였고 김영삼·김대중이란 거목을 배출한 대한민국의 야당이 이토록 비루하고 천박스럽게 추락해 있어서였다. 그런 사회가 해봉에겐 갈수록 남의 옷처럼 맞지 않는 것 같아 불편했다. 10여년 중풍환자로 지내는 동안 성격이 솔아져였을까. 작은 일에도 감동을 받곤 하는 인간성의 작은 미온(微溫)마저 식어서일까 ?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란 명분은 정권야욕에 눈먼 일부 정치꾼들의 가벼운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겠노라. 그것은 혹독한 아픔을 경험케 해줄 가시를 그 가슴에 담아보지 못했을뿐더러 통증없이 뽑으려고만 들었지 곪은 부위를 도려내고 고름을 뽑아내는 가시침으로 활용해 보려 하지 않은 패배자였기 때문이리라.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한 사내가 대통령과 기싸움을 하겠노라 천명하고 허망하게 백골로 삭아진 노인의 장례식을 두고 구원(救援)파인지 구원(仇怨)파인지 모를 집단이 자중지란으로 시끄러운 가을날이었다. 해봉은 명상하듯 어둠 속에서 지난날의 글들을 기억에 떠올렸다.

먼저 영도봉래동 유곽의 기생 금앵의 장례식때 잔소주 다섯 잔 마시고 훌쩍이며 썼던 절구 선창(船艙)이 생각났다.

 

[蓬萊洞船艙봉래동선창夜花發散香야화발산향洞狗潛敵産동구잠적산彎月枯渴彰만월고갈창

봉래동선창의 / 밤꽃들 향기 뿜으면 / 골목길 개새끼들 적산가로 숨어들고/ 손톱달만 고갈산 위에서 서글피 밝은데 ]

 

이어 근래, 지은 시 세월(歲月)이 또 스물거리며 한가닥 새끼로 변해 해봉의 온몸을 묶어대고 있었다.

[모든 성공의 예약.

너의 뒤에서 본 미래는 시선둘 곳조차 없이

밝았으나

모든 실패의 증거.

너의 앞에서 본 과거는 후회할 용기조차 없는

암흑이구나.

수많은 망각의 실체.

너를 버려두고 피해 있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너를 태우지 않고 숨어 있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

이제 관절을 꺾고

힘줄을 끊어야 할 시간

!

세월이 치유(治癒)의 가시침이었구나.]

2014.8.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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