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어머니 - 2011년 [여성조선] 수상작 (이모님글)

2011. 8. 10. 20:47외가의글

바다를 보면 나는 어머니가 생각난다.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영상은 항상 바다와 함께였다.

어머니는 십팔 세 꽃다운 나이에 한 살 위인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포부가 컸던 아버지의 의지(意志)에 따라 부부는 삼년 만에 고향을 등지고 바다가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운명은 바다에 옭매이는 신세가 되었다.

 

외지로만 떠돌던 아버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정체성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겐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자녀들의 양육을 책임져야 했던 여인의 삶은 가혹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장사밑천이 무일푼이었기에 택한 곳이 바다였다고, 빈손으로 가도 뭐든 건져올 수 있는 곳이 바다라고, 어머니의 말은 전설처럼 내 귓가를 맴돌았다. 겨울의 칼바람에도 어머니는 바다를 찾았다. 바닷말에 한줌 곡식을 넣어 멀겋게 끓였던 해초 죽 먹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지금도 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국물 있는 음식을 보면 유년의 아팠던 시절을 회상하는 기억들이 강렬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먼먼 옛날 해초를 뜯다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갔는데, 또 한 번의 거센 파도에 실려 바위로 덜컥 올려졌다는 나의 어머니. 자라면서 들었던 그 얘기는 우리 형제들의 정신을 올곧게 잡아주는 교훈이 되었다.

 

우리 가족에 있어 바다는 무한한 생명의 보고(寶庫)이면서도 고통의 바다로 인식되고 있다. 흔히들 딸은 어머니의 살아가는 모습을 닮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딸들의 마음속엔 결코 어머니의 삶같이 살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서서히 무장되어 갔다. 나는 바다가 싫었고, 바다를 영영 볼 수 없는 곳에서 살기를 고대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아버지의 존재가 서서히 잊혀져갈 때쯤 아버지는 돌아왔다. 당신의 설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다를 주시하는 멍한 눈빛에서 고독이 감지되곤 했다. 아버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후회가 자신을 갉아먹는 독이 되어 시름시름 앓았다.

젊은 날의 기백과 능력을 소진하고 처자를 외면했던 당신에게 힘이 되어줄 버팀목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병색이 짙은 모습에서 안됐다는 생각도 잠시, 특히 딸들에겐 이미 끊겨버린 부성애를 상쇄할 만한 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불평 없이 병간호하는, 늙고 주름진 어머니 얼굴을 보며 우리 자매들은 쓸개도 없는 여인이라 어머니를 몰아붙였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사람을 어찌 용서하지 않느냐”고 우리를 달래셨다. 최대의 피해자는 어머니 자신이었다. 양반가의 막내딸로 늘 책을 읽었다던 부친과 세 명의 오빠들이 끔찍이도 아꼈던 어머니의 처녀 적 아름다운 시절은 결혼과 함께 사라져버렸다.평생 고통을 안겨준 지아비였지만,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죽음을 맞이하게 하셨다. 우리 딸들은 울지 않았다. 아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참으로 속이 깊은 여인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는 아비 없는 호로 자식들 될 뻔 했는데, 그래도 처자 앞에 나타나 우리 손으로 무덤을 만들었으니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식들이 마치 아버지에 의해 구원이라도 받은 느낌이 들도록 말씀하신 어머니를 우리 형제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 년쯤 뒤였다. 온가족이 태종도로 놀러갔을 때 바위에 부딪히는 물살을 무심히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께 물었다. “바다를 보면 지긋지긋하지 않느냐?”고. 어머니는 옛날을 회상하시듯 눈물을 훔쳤다. “외지로 무작정 나올 때는 그래도 너희 아버지가 있어 든든했었는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생각나는 것 같았다. 부부란 어떤 관계일까? 가정을 버린 남편 때문에 그렇게 모진 고통을 겪었음에도 건강하게 자란 자식들 모습에서 모든 보상을 받은 듯 어머니는 이내 웃으셨다.

 

어머니 얼굴이 겹쳐지던 고통의 바다가 이젠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던 소망은 내게서 잊혀진지 오래되었다. 손을 뻗치면 물살이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영도(影島)가 그리워진다. 별 탈 없이 건강을 유지하는 내 체력의 영양소는 그렇게도 하찮게 여겼던 미역과 파래 곤피다.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흡수한 영양소는 온통 바다였다.

 

국을 잘 먹지 않는 내 식성을 꼭 빼닮아 국을 안 먹는 딸을 보면 섬뜩한 생각이 든다. 모녀간의 유전적 현상 앞에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살아온 어머니 몸속의 어떤 인자가 내게 유전된 걸까! 시간이 갈수록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아버지와 일말의 추억이 없는 성장기를 비극이라 생각했다. 이제 나이가 든 탓인가, 세월은 우리가 상실한 시간을 추억과 함께 지혜로 보답해준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는 요즘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정수리 머리가 다 빠질 만큼 이고 졌던 어머니 자신의 역경을 생각하면 어머니는 어찌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모든 오물도 거대한 물살로 희석시키는 바다처럼 아버지의 오점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정화시킨 어머니의 마음은 바다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고향 땅에 묻히셨다. 두 분의 봉분을 바라볼 적마다 나는 어머니의 철학이 역시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들의 반대로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완성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신 부모님을 우리 형제들은 결코 볼 수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살아가는 과정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사후 나란히 누워계신 부모님 묘소 앞에서 자녀들은 안도감과 평안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 어머니는 삶의 진리를 아신 현인(賢人)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이루셨다.

 

바다 같은 어머니의 철학대로 살아가면 내 삶의 말년에 완성이란 생각이 들 수 있을는지.                     박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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